주립미술관 큐레이션 No. 15
하늘에서 하나의 빛줄기가 내려온다. 그 빛이 닿는 곳은 단 한 곳,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빛 주변으로, 온 세상을 덮은 어둠이 있다. 렘브란트의 〈세 개의 십자가〉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가 골고다 언덕 위에 울려 퍼지던 그 순간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 목차
- 작품 기본 정보
-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 성경적 배경 — 마태복음 27장
- 그림 속으로 — 빛과 어둠이 선고하는 신학
- 성경 속으로 —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참뜻
- 오늘날 우리의 투영 — 버림받음의 절규가 우리에게 주는 것
-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
- 요약 및 감상 포인트
작품 기본 정보

| 항목 | 내용 |
| 작품명 | 세 개의 십자가 (The Three Crosses / Christ Crucified between the Two Thieves) |
| 화가 |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1669) |
| 제작 연도 | 1653년 (이후 약 10년에 걸쳐 5단계로 개정) |
| 재료 | 드라이포인트 및 뷔랭 (Drypoint and Burin on copper plate) |
| 크기 | 약 38.5 × 45 cm |
| 제작 배경 | 특정 의뢰 없이 작가 개인이 제작한 자유 작품 |
| 주요 소장처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뉴욕), 피츠윌리엄 미술관(케임브리지),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등 다수 |
|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7장 45~54절 |
미술사가들로부터 "지금껏 제작된 가장 역동적인 판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렘브란트의 <세 개의 십자가>를 지금부터 만나본다.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생애와 미술 교육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은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방앗간 주인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였고,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1620년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회화에 더 큰 소명을 느껴 곧 야콥 판 스와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에게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이후 암스테르담의 역사화가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에게 6개월간 결정적인 수업을 통해 극적인 구성과 감정 표현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독자적인 작업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두었고,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그러나 말년에는 파산을 선고받고 이름 없는 임대 무덤에 묻힐 만큼 극도의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뒀다.
바로크 미술과 렘브란트의 특이점
렘브란트는 바로크(Baroque) 시대의 거장이다. 바로크 미술은 17세기 유럽을 지배한 양식으로, 강렬한 감정 표현, 극적인 명암 대비, 역동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바로크 화가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핵심 기법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즉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이다. 그러나 그가 이 기법을 사용한 목적은 단순한 극적 효과가 아니었다. 렘브란트는 밝은 빛 속에 단순하게 윤곽만 드러난 인물에서부터 어둠 속에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까지, 빛과 어둠의 교차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가장 보편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전달했다.
그는 성경적 주제에 관해 동시대 화가들보다 훨씬 깊이 몰두했다. 160점 이상의 성화 작품, 80점의 에칭, 600점의 성경 관련 드로잉을 남겼다.
신앙
렘브란트의 신앙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주제 중 하나이다. 팩트에 근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의 개신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가 신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특정 교단의 정식 회원이 아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칼뱅주의자, 재세례파, 가톨릭, 유대인 등 다양한 신앙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했으나, 학자들은 그를 "헌신적이되 초교파적인 그리스도인(committed, if ecumenical, Christian)"으로 결론짓는다.
특히 그의 개인적 신앙 체계의 핵심은 종교개혁의 도가니 속에서 정제된 바울 신학(Pauline theology)이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을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신앙적 자기 이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의 영성은 어느 교단의 교리보다 성경 자체,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성경적 배경 — 마태복음 27장이 전하는 순간
이 작품의 직접적인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27장 45-54절이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태복음 27:45-54)
케퍼 아트 뮤지엄의 폴 크렌쇼(Paul Crenshaw)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는 마태복음 27장 46~54절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장면은 십자가 사건의 신학적 절정이다. 오후 세 시, 여섯 시간의 어둠이 온 땅을 뒤덮은 후,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며 절규하셨다. 이 외침은 단순한 고통의 호소가 아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들어가시는,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으로 — 빛과 어둠이 선고하는 신학
기법 — 드라이포인트(Drypoint)
〈세 개의 십자가〉는 렘브란트가 구리판 위에 드라이포인트 기법만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어떤 매체에서든 그의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드라이포인트 도구가 구리판을 파고들 때 생기는 벨벳 같은 버르(burr)의 질감을 최대한 활용했다.


드라이포인트는 당시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인쇄기의 압력에 의해 버르가 빠르게 마모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이 크기의 드라이포인트 단독 작품은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었다. 렘브란트가 이 기법을 선택한 것은 기술적 도전이자, 이 주제가 요구하는 극적 표현력을 위한 신학적 선택이었다.
또한 렘브란트는 구리판에 의도적으로 잉크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각각의 인쇄본을 독자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양피지(vellum)에 인쇄한 경우, 양피지의 낮은 흡수성이 잉크를 표면에 머물게 하여 선을 부드럽게 하고 전체적인 풍부함을 더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약 10년에 걸쳐 총 5단계로 지속적으로 수정했으며, 각 단계마다 어둠의 밀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갔다.
구도 — 세 개의 십자가와 하나의 빛
화면 중앙에는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로마 병사들과 말들, 애통하는 시민들이 세 십자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어두워진 하늘을 뚫고 단 하나의 빛줄기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형체를 감싸안는다.
이 빛줄기가 이 그림의 신학적 핵심이다. 온 세상이 어둠으로 덮인 그 순간, 오직 그리스도 위에만 빛이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죽음으로부터 등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임을 가리키는 빛이다.

렘브란트는 구리판을 짙은 그림자로 뒤덮어 골고다 언덕 위 장면 전체를 혼돈스러운 분위기로 강화했다. 빛 속에서 단순한 윤곽선으로만 표현된 인물들과, 어둠 속에서 정밀하게 새겨진 인물들의 대비가 화면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 어둠의 밀도는 단계가 거듭될수록 더욱 짙어지는데,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대속의 무게를 점점 더 깊이 성찰해 간 렘브란트의 신앙적 숙고의 흔적이다.
성경 속으로 —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참뜻
렘브란트의 화면이 우리를 멈춰 세우는 이유는 단순히 그 압도적인 어둠 때문이 아니다. 그 어둠이 담고 있는 절규의 신학적 무게 때문이다. 이 외침은 기독교 신학에서 '버림받음의 절규(Cry of Dereliction)'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십자가 신학의 가장 깊고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① 이것은 시편 22편의 의도적 인용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단순히 고통을 호소하신 것이 아니다. 시편 22편 1절을 히브리어로 인용하심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시편 22편 전체를 불러일으키셨다. 시편 22편은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열방의 찬양으로 끝난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시편 22편의 전체 서사가 지금 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마태복음 27장의 십자가 장면에는 시편 22편의 세부 묘사들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 시편 22편 | 십자가에서의 성취 |
|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7절) | 지나가는 자들의 조롱 (마 27:39) |
| "내 손발을 찔렀나이다" (16절) | 못 박히심 |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8절) | 군병들의 제비뽑기 (마 27:35) |
| "내 힘이 말랐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15절) | 목마르심 (요 19:28) |
이 일치들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을 살아내셨고, 그 인용을 통해 "지금 이 죽음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완성이다"라고 선언하셨다.
②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버리셨는가
이 질문은 삼위일체 신학에서 가장 긴장감 높은 논제이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세 흐름의 해석이 있다.
| 해석 | 내용 |
| 실제 유기(遺棄)설 | 성자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순간, 성부가 형벌의 집행자로서 성자에게 얼굴을 돌리셨다 |
| 인성의 고통 표현설 | 신성이 아닌 인성으로서 극도의 단절감을 표현한 것이며 삼위일체 내적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다 |
| 시편 인용설 | 시편 22편 전체를 의도적으로 인용하신 것으로, 절망보다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
개혁신학 전통에서는 이 세 해석을 단순히 택일하지 않는다. 성자가 인류의 죄에 대한 성부의 형벌적 진노를 실제로 담당하고 감당하셨다는 것(형벌 대속, Penal Substitution)을 인정하되, 이것이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구분한다. 성부와 성자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나, 성자는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담당하셨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육신과 영적 지옥의 고통을 오롯이 담당하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절규이며,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선언하는 가장 거룩한 문장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선언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4)
'한 제물'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이 심판은 반복되지 않는다. 완전히, 단번에 이루어졌다.
③ 이 절규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선언이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결코 그리스도의 패배의 외침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의 완성이 시작되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절규가 멈춘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
렘브란트의 화면 속 어둠은 이 서사 전체를 담고 있다. 그 어둠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몸 위에 임하는 빛줄기는, 절규가 선언으로 바뀌는 바로 그 신학적 전환점을 시각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투영 — 버림받음의 절규가 우리에게 주는 것
이 작품 앞에 서서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버림받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리, 오랜 노력이 무너지는 순간,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시간. 그 어둠의 한복판에서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고 싶었던 순간들.
렘브란트의 이 작품은 그 고통이 낯선 것이 아님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 어둠 속으로 내려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영원한 버림받음, 즉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대속(代贖)의 완성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절규가 멈춘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요 19:30)
우리가 결코 버림받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버림받으셨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화면 속 어둠을 다시 보라. 그 어둠은 절망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 위에 쏟아지던 순간의 색이다. 그리고 그 어둠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감싸는 빛줄기는, 이 죽음이 끝이 아님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
렘브란트의 붓끝, 아니 드라이포인트 바늘끝이 구리판에 새겨 넣은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 버림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이 칭의(稱義)의 근거가 아닐까.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도덕적 완전함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에 합당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 위에 완전히 쏟아진 그 순간, 우리를 향한 진노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롬 3:25, 히 10:14)
이 복음 앞에 설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다. 빈손으로 그 빛 아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요약 및 감상 포인트
이 작품 앞에 설 때 눈여겨볼 세 가지 포인트를 정리한다.
① 빛줄기의 방향을 따라가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정확히 어디에 닿는지 따라가 보라. 그 빛이 닿는 단 하나의 자리가 이 그림 전체의 신학적 선언이다.
② 어둠의 밀도를 느껴라
드라이포인트 기법이 만들어낸 벨벳 같은 어둠의 질감은 평면적 검정이 아니다. 온 세상의 죄가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게를 느껴보라.
③ 단계별 변화를 비교하라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10년에 걸쳐 다섯 단계로 개정했다.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를 비교하면,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혼돈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작품이 진화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대속의 무게가 깊어지는 신학적 숙고의 흔적이다.